'숨은 기부왕' 작사가 김이나가 직접 동물보호 활동에 나선 이유
지난 2013년 여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5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그들은 ‘동물학대를 멈춰라’, ‘고양이 학살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지하실에서 지내던 길고양이에게 불편을 느끼던 일부 주민들이 지하실 문을 걸어 잠근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지하실서 무슨 일?…압구정 A아파트 길고양이 학대 논란
살아있는 고양이 3일 동안 지하실 감금…A아파트 측은 전면 부정[CBS노컷뉴스 유원정 인턴기자] 압구정 A아파트가 길고양이 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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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참가자들을 본 아파트 주민들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주민들은 혀를 차며 “제대로 알고나 말하라”고 거칠게 말했다. 주민들 눈에 집회 참가자들의 구호는 나약한 이들이 순진하게 ‘귀여운 고양이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집회에 참가했던 작사가 김이나 씨는 그 자리에 나서기까지는 나름의 굳은 용기가 필요했다. 평소 내성적이었던 그는 정의를 위해 앞장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전해 들은 뒤, ‘이번에는 뭔가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난생 처음 집회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사건 발생 2년 전인 2011년부터 함께 살게 된 고양이 ‘봉삼이’와 ‘달봉이’가 그의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보호본능 자극한 반려묘들, 외려 제 결핍 채워줬죠”
작사가 김이나씨의 반려묘 '달봉이'(왼쪽)와 '봉삼이'. 김이나 인스타그램
Q. 본인 SNS에 가면 봉삼이와 달봉이의 예쁜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양이들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첫 만남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인터넷에서 고양이를 분양한다는 분이 계셔서 사진을 봤어요. 그전에는 ‘고양이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봉삼이의 사진을 본 뒤에는 뭐에 홀린 듯 이끌려 찾아가게 됐죠.
직접 만난 봉삼이는 유독 덩치도 작고 소심해 보였어요. 달봉이도 마찬가지였어요. 달봉이를 데려올 때는 원래는 다른 예쁜 아이의 사진을 보고 찾아갔는데 정작 눈에 들어온 건 힘이 없고 위축된 달봉이었죠. 제가 안아보니 달봉이가 힘을 빼고 몸을 맡겨오는 거예요. 결국 달봉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죠.”
Q. 달봉이와 봉삼이에게는 ‘소심하고 다른 고양이 무리에서 위축된 친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보호본능을 자극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맞아요. 그런 아이들이 주는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제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Q. 달봉이와 봉삼이가 김이나 씨의 일상에 들어오게 된 뒤, 무엇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세요?
“고양이 키우는 분들이라면 그 느낌을 알 거예요. 교감이 되거든요. 생명체와의 교감은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적으로도 이뤄지잖아요. 가끔은 언어만으로는 교감이 잘 안될 수 있어요. 그런데 고양이와 살다 보면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생명체와 교감하는 경험을 하게 돼요. 가끔 말로 소통을 하다 보면 말이 오히려 걸림돌처럼 느껴지곤 해요. 감정 전달이 안 되거든요. 가끔 고양이가 나를 바라봐 주는 눈빛이 느껴지기도 하죠. 그러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말을 실감해요.”
김이나 씨는 '고양이는 자신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라고 말하며 반려생활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이나 인스타그램
Q. 힘들 때 고양이와 교감하면서 힘을 받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힘든 일은 어떤 걸 말하나요? 창작의 고통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일을 하면서 힘든 건, 결과물이 나오면 해소가 돼요. 그래서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 좀 고통스러워요. 회의감 같은 걸 느끼거든요. 내가 쓸모있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예요.
그런데 고양이들은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같아요. 저는 조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자랐는데 조부모님들은 제가 뭘 잘하건 못하건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셨던 분들이었어요. 고양이들과 살면서 그런 사랑을 느꼈어요.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면 저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는 걸 느끼는데 얘들은 그런 게 없어요. 그런 모습이 제 결핍을 채워주는 힘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는 스스로를 ‘축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이 큰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고양이는 그 균형을 맞춰주는 존재였다.
스스로 초라하다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동물 친구들이 나를 반겨줘서 힘을 받는 건 정말 상투적인 얘기죠. 반대로, 제가 요즘 방송 출연이 많아져서 좀 들뜨기도 해요. 그럴 때도 고양이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면 저는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라고 중심을 잡게 돼요.
“'동정과 연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작사가 김이나씨 가 지난 2019년 11월 15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회 모임'에 참석해 회의 발언을 듣고 있다. 동물권행동 카라 제공
Q. 브라운아이드걸스 제아의 솔로곡 ‘길고양이’(2013)의 가사를 쓰셨어요.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나는 멋져’, ‘아무도 나를 간섭할 순 없어’ 등의 가사 속 길고양이의 모습이, 우리가 ‘길고양이’ 하면 떠올리는 느낌보다 훨씬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였어요. 길고양이의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떠올렸나요?
“봉삼이, 달봉이와 함께 살기 전에는 길고양이를 보면 ‘춥겠다’, ‘불쌍하다’, ‘어떻게 하지’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고양이들과 직접 살아보니까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달봉이랑 봉삼이가 창밖을 가끔 볼 때면 길고양이가 지나가는 게 보여요. 순간, ‘길고양이가 집안에 있는 달봉이랑 봉삼이를 보면 부러워할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만의 생각인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 가사를 쓰게 됐어요.
길에서 사는 고양이라고 해서 낙오된 고양이, 잉여 생명체 정도로 바라보게 되면 해결책은 동정과 연민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선의로만 돌보는 시혜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냥 ‘길에도 존재하는 생명체’로 길고양이를 바라보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TNR(중성화 후 제 자리 방사) 정책이나 밥을 주는 것, 추위를 피할 집을 지어주는 게 ‘동등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Q. 길고양이를 보면 걱정되지는 않나요?
“물론 걱정은 돼요. 작고 약한 생명이니까요. 게다가 고양이에 혐오 감정을 가지신 분들도 있잖아요. 하지만 걱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죠. 그래서 그 집회(압구정 길고양이 사건)에도 나가게 됐던 것 같아요.
고양이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기 전에도 길고양이를 딱히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진 않았어요. 쥐도 별로 안 무섭거든요.(웃음) 그냥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길고양이가 저를 덜 피하는 동네는 좀 ‘좋은 동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공격적이거나 경계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동네 사람들이 잘 대해준다는 뜻이니까요.”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앞장서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라던 그가 왜 ‘집회 참여’라는 큰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성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날의 집회 이후로 ‘김이나가 동물보호 활동에 나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뒤에서 조용히 후원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카라에서도 2012년부터 그가 고액의 후원을 꾸준히 해왔다는 사실을 2019년이 되어서야 알게 될 정도였다. 인터뷰에 동석한 카라 임순례 대표는 “액수도 중요하지만 기간에 더 눈이 갔다”며 “어떤 사건을 보면서 잠시 후원을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후원해왔다는 건 진정성이 있다는 얘기”라면서 김이나 씨를 추켜세웠다.
지난 2019년 11월 15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회 모임' 회의에 앞서 작사가 김이나(왼쪽)와 카라 임순례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그람이 정진욱
그런 그가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공동 위원장을 맡게 됐다. 더봄센터는 카라가 경기 파주시 법원읍 일대에 건립 중인 새로운 동물보호소다. 카라 측은 더봄센터가 한국의 동물보호소 개념을 새롭게 바꾸고 한국의 반려문화를 한 단계 높이는 교육장 역할을 할 ‘종합 반려동물 보호센터’로써 자리 잡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김이나 씨는 공동 위원장인 성악가 조수미 씨와 함께 더봄센터의 건립을 위해 홍보와 모금 등에서 역할을 할 예정이다.
Q. 위원장 자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수락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미신에 휘둘리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는구나’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저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소리 없이 뒤에서 면죄부를 구입하듯 기부나 후원을 하면서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요새 방송에 출연도 하고, 관심도 많이 받고 있다 보니 ‘지금이 전성기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할 수 있는 시기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희생한다, 그런 생각은 아니에요. 이 일에 참여하면서 저도 좋은 기분을 느끼니까요.”
Q. ‘해야 될 때’라는 말을 들으니, 앞서 봉삼이, 달봉이를 데려올 당시의 마음과 비슷해 보입니다.
“맞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회피와 거절을 통해 숨는 게 일상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일은 이례적으로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제가 교회는 가지 않지만 신의 존재는 믿어요. 사람에게는 소명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저라는 존재의 쓰임새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요.”
Q. 더봄센터 건립 계획을 듣고 처음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위원장으로 위촉되기 전, 카라에 내던 후원금을 늘렸어요. 그 후원금이 더봄센터 건립에 쓰이는 돈이었죠. 이건 정말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지난 2019년 11월 15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회 모임'을 마친 뒤 작사가 김이나 씨가 손팻말을 들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동물권행동 카라 제공
Q. 왜 그런 느낌을 받으셨나요?
“제가 처음 카라에 후원을 하게 된 이유도 동정심에 호소하려고 하지 않아서예요. 그보다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죠. 우리 사회가 동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단체에 주목했어요. 동물보호 활동이 선의와 동의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유기동물을 보고 ‘안쓰럽다’는 느낌을 주도록 하기보다 좀 더 깔끔한 시설과 좋은 시스템을 갖춘 장소에서 동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동안의 동물보호소는 안쓰러운 마음을 느끼게 해서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동물을 데려오던 곳이었어요. 반면 외국의 동물보호소는 구경하러 가는 곳이에요. ‘친구를 만난다’는 느낌으로 접근하게 되죠. 사실 활동가가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가정집이나 잘 꾸며진 펫샵을 보고 ‘저기 귀여운 아이가 있네’라면서 데려오잖아요. 저도 그렇게 봉삼이를 데려왔고요. 만일 펫샵이 없어진다면, 대중이 부담 없이 찾아갈 보호소가 어디인지 질문받을 것 같은데, 그때 '더봄센터'라고 답할 수 있었으면 해요.”
한국 최고의 작사가로 손꼽히는 만큼 김이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깊은 생각만큼 열의도 느껴졌다. 카라 측에서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상당해 보였다. 기대에 부응하듯, 김이나는 12월31일, 연말을 맞아 더봄센터 건립기금 3,000만원을 추가로 내놓았다.
지난 2019년 11월 15일 서울 서초동에서 열린 '카라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회' 모임에서 작사가 김이나 씨가 공동 위원장 위촉장을 받은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동그람이 정진욱
Q. 앞으로 위원장으로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일단... '바빠서 일을 많이 못할 수도 있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공동위원장으로 조수미 선생님을 추대하시면서 제 입을 틀어막으셨어요.(웃음) 거국적으로 대단한 걸 하기보다는 주변에 알음알음 알리는 일부터하려고 해요. 사람들이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전하고 나면 다른 분들도 관심을 가져주시겠죠."
인터뷰 이후 그는 "주변에 알음알음 알리겠다"는 약속부터 실천했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프로필에 '카라더봄센터추진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걸어놓고, 장문의 글로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도 했다. 자신이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김이나의 밤편지'(MBC 표준FM)에서도 위원장 위촉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전하며 더봄센터와 관련된 소식들을 진행 도중 슬그머니 꺼냈다. 2020년 새해, 더봄센터 건립추진위원장 김이나가 보여줄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다른 작가들과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해보고 싶어요. 이미 동물에 대해서 잘 알고, 도울 마음이 있는 사람들보다 과거의 저처럼 동물을 데려오고 싶으면 펫샵이나 브리더를 찾는 사람들이 보호소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요. 그로 인해 더봄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겠죠.